예전에 20대 초반 대학생 시절일 때 제가 잘 다니던 어느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종종 본 적이 있다.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데 우울증이래요. 사귀어도 괜찮을까요?"
혹은... 우울증 있는 사람과는 연애하지 말라는 식의 조언 글도 여러 번 보았었던 기억도 난다.
수 년 뒤 이렇게 내가 직접 우울증 환자가 되고 보니(실은 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미 우울증 환자였겠지만 그 전까진 한 번도 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 어쨌든 내가 '공식적'으로 우울증 환자가 된 건 스물여덟 살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애인이 되기에는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애인이 되기에" 결함이 있기로는 실은 우울증만이 다가 아니었다. 언니가 장애인이라는 사실, 거기에 우리 집은 겨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수준의 가난한 집이라는 사실. 결국 언젠가는 부모님과 더불어 언니까지 세 식구를 내가 혼자 모두 책임져야 하는 게...... 앞으로 곧 머지않아 나한테 들이닥칠 현실이었는데,
모든 연애의 끝은 헤어짐 아니면 결혼,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 그동안 나에게 다가왔던 모든 남자들에게 연애 시작 전에 이러한 내 상황을 전부 솔직하게 털어놓곤 했다. "내가 지금 이런 상황인데, 그래도 감당할 자신 있어?.", 재미있게도 그 사람들은 모두 "그 정도쯤이야 감당할 수 있다"며 나에게 고백을 해 왔고, 그 중에는 직접 강릉의 바닷가에까지 나를 데려다가 로맨틱하게 고백을 해 오는 사람도 있었고, 아예 펑펑 울면서 진심을 전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현실이 시궁창이었던 나도, 많이는 아니지만 제법 연애를 해 볼 수 있었다.
비록 지금까지 단 한 번도 6개월 이상 지속되었던 적은 없었지만.
나도 연애를 많이는 아니지만 여러 차례 해 보았고, 들려오는 주변의 사례들도 고려해보면,
"상대가 '우울증 환자'라서 네가 정말 힘들 거다, 우울증 환자와는 연애를 권하지 않는다", 라는 조언은 그닥 무의미한 것 같다. 우울증 환자 아닌 정상인이라 해도 연애 관계 안에서 미친X들은 너무나 많기 때문ㅇ.....
가까운 관계일수록, 그만큼 가까우니까, 편하니까, 기대하는 게 많아지니까, 그래서 더 서운하니까, 서운할수록 더 붙잡고 싶게 되니까.... 등등의 이유로 오히려 연인에게 배려 없이 막 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기도 하다. 연애 경험이 없었던 시절 나 역시도 그랬었고, 연인 상대를 힘들게 만드는 데에는 그 사람이 우울증 환자이고 정상인이고의 구분은 크게 의미가 없는 것 같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정말 황당한 케이스들이 너무 많ㅇ.....바람을 피우는 건 고사하고 결혼 직전에 파혼을 당하느니 마느니 등등....
연애 경험이 아예 없었던 첫 연애는...
나의 그 엄청난 감정기복을 있는 대로 남자친구한테 다 쏟아내고 살았다. 마땅히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또 나를 사랑해준다고 하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람이었으니까. 지금은 명백히 이게 잘못된 행동이란 것을 알지만 그 땐 몰랐다.
그렇게 한 150일 정도 사귀다가 차였는데,
너같이 미친 년은 태어나 처음 본다느니 역시 정신병자라느니 온갖 폭언 오브 폭언을 들으며 보기 좋게 차였다.^^
그 이후로 연애를 하는 게 조금은 조심스러워졌다. 어쨌거나 세상에서 제일 가까웠던 사람이 한 순간에 평생 안 볼 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건 나한테는 정말 큰 경험이었으니까.
그래도 한때는 남자친구에게 의지해보고 싶었다. 한번씩 마음이 힘들 때 속에 가득 쌓인 푸념도 맘껏 털어놓아 보고 싶었고, 위로도 받고 싶었고, 말이 안 된다는 거 알지만 그냥 제가 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해주고 마냥 칭찬해주는 상대를 기대해 보기도 했고...
그런데 모든 연애가 다 마찬가지인 것 같기는 하지만, 상대에게 기대하는 게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스스로 실망도 많이 하게 되고 서운함도 많이 느끼게 되고...결국 나만 힘들어지곤 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힘들었다. 그 누구도 나를 힘들게 만들지 않았는데 내가 나 스스로를 자꾸만 힘들게 만든다.... 그런 경험들이 몇 차례 누적되고, 나 스스로도 여러 상대를 만나며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반성하는 것도 많아지면서, 지금은,
처음부터 "상대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 태도"가 어느 정도는 연습이 된 것 같다.
이 사람 원래 이런 사람이야, 내가 뭘 한다고 한들 바뀌지 않아, 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해, 그러지 않으면 결국 이 연애도 끝이야, 나만 힘들어지게 될 거야.....
무엇보다도
(1) 내가 지치고 힘들고 우울한 거 백날 남자친구한테 내색해봐야 그렇다고 우울증이 치유되는 게 아니고
(2) 내색한다고 해서 내 우울의 깊이를 이 사람이 짐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3) 세상 부정적이고 축축 처지기만 하는 친구를 옆에 두고 있으면 나 역시도 기 빨리고 우울해지듯, 내가 힘든 티를 내면 낼수록 나와 가까이 있는 상대 또한 나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등등...의 이유로
지금은 웬만해서는, 남자친구에게는 힘들어도 힘든 티를 잘 내지 않는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일단 말을 많이 아끼게 되고,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속으로 내 나름대로 정말 심사숙고를 하게 되고....
엄청나게 텐션 업 되었다가 밑으로 한없이 가라앉았다가 하는 감정 기복이 때때로는 정말 극한으로 치달을 때도 있지만,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판단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털어놓고 싶은 말이 있다면 차라리 상담 선생님께 털어놓는 것이 나한테 도움이 더 많이 된다는 걸 늘 생각하면서. (그리고 실제로 그게 맞기도 하다. 남자친구한테 털어놓는 것보다는 상담 선생님께 털어놓는 것이 현실적으로 나에게 훨씬 도움이 많이 된다.)
지금 남자친구의 말로는 너는 티를 안 낸다고 하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을 땐 다 보이기는 한단다. 뭐, 어떻게 그게 100퍼센트 완벽하게 감춰지겠냐마는.... 그래도 최대한 감추려고 노력은 많이 하고 있다.
이런 얘기를 내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으면 넌 대체 연애 왜 하느냐는 말도 듣기는 한다. 힘들 때 기대려고 남자친구 옆에 두는 거 아니냐...라는 식의....??
그런데, 잘 모르겠다.
일단 지금까지의 연애는 항상 나 스스로가 너무 힘들었다.
안 그래도 나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많은데 연애는 그 삶의 무게를 한 두어 배는 더 가중시켰다.
그래서 아예 연애 자체를 안 하려고 마음먹은 적도 많았다. 신기하게도 그럴 때마다 다가와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 다짐 매번 얼마 못 가고 깨지긴 했지만.
(다가오는 사람 막지 말고 떠나가는 사람 붙잡지 말자는 게 제 삶의 신조라서, 다가오는 사람에게 마구 철벽을 치지는 않습니다 제가...ㅎㅎ)
어떻게 하면 내가 힘들지 않은 연애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한 것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이거였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선을 지키는 것, 언제 한 순간에 돌아서서 남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늘 염두에 두는 것, 지금의 관계가 소중하다면 그만큼 "소중하게" 이 관계를 다뤄나가야 한다는 것,
그래서 지금은 최소한, 연애 자체가 나한테 힘들지는 않다.
지금의 남자친구는, 연애를 나보다 한 다섯 배는 더 많이 해 봤던 사람이지만,
나처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을 여태 처음 만나봤다는 말을 종종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일단 속으로는 그 전의 남자들도 매번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라는 식의 말을 참 많이 했지만 6개월도 안 가서 모두 카톡 한 줄 남기고 날 버리고 갔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매 순간 순간 자살하고 싶은 욕구와 싸워야 하는 나는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일상생활 자체를 정상적으로 영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라고 대답해주곤 한다.
아마 지금 내 곁에 있는 남자친구도 알게 모르게 나한테서 받고 있는 어두운 기운들이 있기는 할 터다.
내가 마냥 밝고 유쾌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내 곁에 있어주는 것이 고맙고, 조금이나마 나를 웃게 만들어주려고 노력하는 것도 고맙고, 여러가지로, 고마운 게 참 많다.
사람 마음 언제 한 순간에 돌아설지는 아무도 모르긴 한다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튼 결론은,
우울증 환자도 연애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매일 그렇게 약 먹으며 살면서도 꾸준히(?) 연애를 해 오고 있습니다.
다만 서로 노력은 필요합니다. 어느 연애가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냐마는
적어도 저는, 일상에서 정말 노력을 많이 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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