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고 거르는 회피형? 회피형이 말하는 회피형 인간 (1)
내가 처음부터 회피형 인간이었던 건 아니다. 첫 연애 당시에 난 어마어마하게 집착 쩌는 불안형의 인간이었다.
첫 연애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연애를 어떻게 하는지를 몰라 더 서툴렀던 것도 있지만...... 그 땐 정말 세상에서 그 남자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뻥이 아니고 진짜 그 남자가 내 세상의 전부였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가슴이 막 팽창했다가 수축했다가,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아주 정신을 못 차렸다. 20대 내내 지금까지 불면증으로 힘들어하고 있지만, 내가 처음으로 연애를 하던 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꿀잠을 잘 잤던 시간들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그랬다. 그 때만큼 편안하게 잠을 자 본 기억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을 느끼며 잠을 잔다는 게 이렇게나 안정감을 주는 일인 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래서 더더욱 집착이 쩔었던 건지, 그 사람과 조금만 연락이 안 돼도 부재중 전화 수십 통에 카톡을 50개 100개씩 폭탄을 날리곤 했다.(...) 아침에 굿모닝 카톡이 안 와 있으면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고, 남자친구의 목소리 어조 하나하나에 그 날의 내 컨디션과 멘탈이 좌우됐다. 감정 기복이 주체가 안 되니 조금만 수 틀리면 있는 대로 화도 엄청 많이하 내고, 울기도 많이 울고, 참 내가 생각해도 그 때 나는... 미친년도 그런 미친년이 없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남자친구는 얼마 못 가서 금방 나를 질려했고, 결국은 아주 거한 쌍욕들과 함께 나를 버렸다. 너 같은 미친년 개싸이코 정신병자 처음 봤다며......
첫 연애가 그렇게 엄청난 상처를 남기고 끝이 났다. 그리고 나는 그 때 태어나 처음으로,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내 세상의 전부였던,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단 하루 아침에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어버리는 인간 관계를 경험했다. 이건 나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았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으로부터 버림 받는다는 것은 진심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충격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당시 나는 한 3개월 정도 대인기피증으로 바깥을 나가지 못했다. 대인기피증이라기 보다는... 사람 자체가 너무 무서웠다. 어느 정도로 사람이 무서웠냐면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무서워서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두려워했을 정도다. (......)
그 연애를 끝내고 나서 나는 나 자신을 정말 많이 되돌아봤고, 내가 얼마나 상대방을 힘들게 만들었는지 정말 많이 반성하고 뉘우쳤다. 다음 번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정말 많이 돌아보고 반성했던 것 같다. 같은 상처를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부턴 남자친구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했고, 늘 항상 "이 사람이 언제 하루 아침에 나를 버리고 우리가 남남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남자친구로 인해서 나 스스로 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을 웬만해선 절대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콩깍지로 인해서 현실 파악을 못하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언제나 나는 내 감정을 통제할 수 있어야 했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어야 했다.
타인으로부터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나 자신을 방어하려는 태도는 그렇게 두 번째 연애부터 시작됐다.
(1)편의 글에서, 회피형의 사람들은 갈등 상황 자체를 회피하기 위해 속으로 꾹 참고 인내하고 입 닫아 버린다고 했다. 혼자서 모든 걸 다 참고 인내하는 게 나에게도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혼자서 힘든 게 둘이 같이 힘든 상황보다는 백 배 낫다. 내 감정은 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지만, 상대방의 감정과 다투는 상황에서의 그 불편한 기류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냥 내가 참아버리고 삭이는 편이 훨씬 훨씬 낫다. 그래도 한 번씩 참지 못해서 폭발할 때가 있다. 늘 항상 후회한다. 그냥 내가 참을걸, 잠깐만 참으면 될 일인데 왜 그걸 못 참아서 화를 내버렸을까......
연애 하기 전 썸탈 때가 가장 맘이 편하고 그 때가 제일 행복하다. 마음이 콩닥콩닥 설레고 즐겁고 들뜨는 것도 딱 그 때까지다. 대개 나는 썸 타던 시절의 좋았던 기억을 계속 떠올리며 힘든 상황을 인내하곤 한다. 관계가 확정되지 않았을 때의 그 모호함 때문에, 아무런 책임도 두려움도 없을 그 때가 가장 설레고 행복할 수 있는 것 같다.
회피형의 특징 중에 과거 지나간 애인을 미화한다는 게 있던데 나의 경우는 그건 네버 아니다. 난 한 번 지나간 관계에 대해서는 절대로 네버 좋게 기억하는 일이 없다. 그건 버림 받고 난 직후 그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스스로 "그 새끼는 쓰레기였어"를 주문처럼 되뇌인 결과다. 결국 이 또한 자기방어적인 행동인 거다.
회피형이 믿고 걸러야 하는 쓰레기로 칭해지곤 하지만,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뭔가.. 변호하고(?) 싶었다. 나도 회피형이 쓰레기인 것, 연애하기에 정말 힘든 상대라는 건 다 인정하지만...... 내가 혼자서 삭이고 참고 인내하며 입 꾹 닫고 나 불편한 걸 다 감수할 수 있는 건, 나도 그만큼 너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좋아한다는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언제라도 곧 너를 버리고 떠날 수 있을 것처럼 거리를 두지만, 실은 너랑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으니까 그 모든 걸 다 참는 거고, 너한테 불편함을 끼치기 싫고 상처 주기 싫고 나 역시도 너로부터 상처 받기 싫으니까 그러는 거다. 나는 나고 남은 남이라며 칼같이 선을 긋는 사람들이 왜 타인으로 인해 불편하고 힘든 걸 아무 내색 안 하고 참는 것일까? 불편하면 그냥 버리고 떠나면 될 것을. 물론 대부분의 회피형과의 연애가 그렇게 끝이 나긴 하지만, 그래도 적어도 그 상황에 직면하기 전까지는 널 좋아하고 있었다는 거다.
이걸 쓰기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어떤 걸까?"에 대해 난 아무런 대답도 확신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싸움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자존심 굽히면서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방금 전의 내 모습을 보니.... 그렇게 매번 내가 내 자존심 내려놓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의 방증이었단 걸 알게 됐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사람을 향한 불신을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지(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내 옆에서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널 떠날까봐 늘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며 상처 받을 걸 생각하는 것도 마음 아프지만, 나란 인간 존나 이기적이라서, 그럼에도 네가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나를 정말 좋아한다면 그 두려움과 무서움을 감내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표현을 좀체 하질 않으니 당연히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내 옆에 언제나 있어줬으면 좋겠다.
내가 너를 정말 많이 진심으로 좋아하기 시작하면, 다시 또 콩깍지 백만 겹 씌어서는 너에게 어떤 잘못을 할지 몰라서... 이성으로 통제가 안 되는 상태에서 내가 너한테 어떤 짓을 하게 될지 몰라서. 너는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내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너를 자꾸 힘들게 만들면 너도 언젠가는 나를 질려하며 떠나갈 테니까. 너는 내가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그 모습을 좋아하니까...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결국 그 누구보다도 겁 많고 소심하고 두려움 많은, 그래서 혼자 속으로 삭이는 것 외에는 겉으로 내가 내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못하는 그런 찌질이일 뿐이다. 나는 내가 20대를 거치면서 굉장히 성숙하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나는 오히려 20대를 거치면서 더 좀스러워지고 사람이 작아져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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